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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은 사랑의 그림자
: 검정치마 - <Teen Troubles>
- Released : 2022.09.15.
- Genres : Indie Rock, Power Pop
애틋한 과거에 대한 향수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 특히나 회상으로 떠올리는 그리움만큼 아련하고 아름다운 감정도 없을 것이다. 그 대상이 친구 혹은 연인이든 어떤 장소나 물건이든 기억 속에 남아있고 가끔 다시 떠오른다는 것은, 그만큼 그때의 무언가를 열렬히 사랑했기 때문이다. 아련한 과거를 향한 달콤한 그리움이야 말로 그 시절 가장 밝게 타올랐던 사랑이 남긴 그림자이니 말이다.
잠깐 과거로 돌아가보자. 2008년은 한국 인디씬 제 2의 전성기였다. 계피가 있던 브로콜리너마저는 데뷔앨범 <보편적인 노래>를 통해 감성이라는 키워드를 인디씬에 완전히 이식했고, 장기하와 얼굴들은 '싸구려 커피'와 함께 새로운 파장을 몰고 왔었다. 게다가 같은 해 언니네이발관은 불후의 걸작 <가장 보통의 존재>를 발매하며 전설의 반열로 올라서고 있었다. 그리고 이 쟁쟁한 아티스트들 속에서 한 재미교포가 가져온 뉴욕의 펑크 사운드는, 지금까지 쌓아온 한국 모던록의 정의를 완벽히 무너뜨리며 또 한 명의 인디 스타의 탄생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국 인디씬에 '세련'이라는 키워드를 새롭게 정의내리며 검정치마는 불쑥 나타났다. 신선하고 캐치한 멜로디를 거친 기타 리프로 감싸놓은 그의 데뷔앨범 <201>은 지금 들어도 놀랍지만 당시에는 센세이션 그 자체였다. 조휴일이 나고 자란 뉴저지의 지역번호와 같은 <201>이라는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검정치마는 이 앨범을 통해 바로 옆 동네 뉴욕의 포스트-펑크 / 개러지록 리바이벌의 사운드를 그대로 한국으로 직수입해왔다. 게다가 '좋아해줘'의 치기 어린 투정과 '강아지', 'Tangled' 등 직설적이고 도발적인 가사에 붙여진 19금 딱지는, 그의 음악이 단물 빠진 조선펑크와 브릿팝 카피캣이나 찍어내던 지금까지의 한국 인디씬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신선함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모든 것을 환기시키는 기막힌 신스 도입부와 우주도 녹일 감미로운 로맨스를 담은 'Antifreeze' 덕분에, 검정치마는 2008년을 수놓은 인디 르네상스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며 뜨겁게 타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호평에도 불구하고 검정치마는 이후 앨범들에서 <201>에서 보여줬던 직관적인 펑크 사운드와는 다소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다행히도 이런 검정치마의 행보가 대중적인 성공으로 이어지긴 했지만, <201>과 <Team Baby> - <Thirsty> 사이에는 앨범 선호에 대한 미묘한 간극이 분명히 존재했다. 이런 배경 속에서, 2022년 발매된 <Teen Troubles>는 '그 시절 검정치마'를 연상케 하는 <201> 스타일의 거친 펑크 사운드로 회귀하며 팬들과 평단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Teen Troubles>에서 다루고 있는 주요한 테마는 그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10대 시절의 방황과 지나고 보니 아름다웠던 그 시절을 향한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테마를 전달하기 위해 앨범은 1999년 17살 조휴일 본인의 실제 추억과 허구의 이야기를 교묘하게 엮어 전달한다. 이 앨범에서 그려지는 17살의 조휴일은 어느 10대들과도 다르지 않게 끊임없이 방황하고 사랑 앞에서 좌절한다. 굳이 차이점이라면 미국이라는 배경 때문에 다양한 친구들과 술과 총이 좀 더 등장한다는 점일 것이다. 하지만 앨범은 방황하며 술과 약에 찌들고 미숙한 감정으로 멀어지는 관계를 묘사하면서도, 노련하고 치밀하게 동화적인 노스탤지어를 앨범 내내 유지한다.
<Teen Troubles>의 모든 주제는 사실상 1번 트랙 'Flying Bobs'의 나레이션과 이어지는 2번 트랙 'Baptized In Fire'의 기타를 통해 완벽히 정의된다. 먼저 'Flying Bobs'에서 조휴일은 'MTV 록 스타'라는 거창한 꿈 외에는 모든게 미숙했던 1999년의 10대 시절을 추억한다. 어떤 이유에서든 1999년 여름날의 그 방황은 "혹독하고 푸르던 계절이 깊게 긁고 간 자리"라는 나레이션 처럼 조휴일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이 분명하다. 주목할 만한 점은, 트랙에서 묘사하는 그 어린 시절의 기억은 지극히 개인적인 그리움임에도 불구하고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굳이 록 스타가 아니더라도, 이 세상 그 누구도 거창한 꿈과 지독한 방황을 겪지 않은 완벽한 10대를 보내지는 못했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Flying Bobs'에서 사용된 몽롱한 매미 소리와 함께 시작하는 나레이션은 이러한 노스탤지어를 한층 강화시켜 전달함으로써 리스너가 앨범에 자신의 이야기를 투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바로 이어지는 2번 트랙 'Baptized In Fire'는 시작부터 파멸적인 사랑의 끝을 노래하며 순탄치 않은 방황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린다. 특히 'Baptized In Fire'는 MTV 록 스타를 꿈꿨던 열일곱의 조휴일을 그려낸 앨범답게, 그의 데뷔앨범 <201>의 강렬한 펑크 사운드로 회귀하며 리스너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그렇게 곡은 빠른 템포의 매력적인 기타 사운드를 전면으로 내세우며 <201>과 <Team Baby> - <Thirsty>로 선호가 갈렸던 리스너들에게 '그 시절 검정치마'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을 직접적으로 상기시킨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2008년 검정치마 사운드'로의 회귀는 분명 그의 음악을 아는 팬들에게는 마음 한쪽의 노스텔지어를 정확히 관통했을 것이다.
이어지는 트랙 '어린양'과 'Sunday Girl'에서는 파괴적이었던 앞선 트랙들과는 달리 잔잔한 템포와 성경을 활용한 은유가 눈에 띈다. 대표적으로 '어린양'에서는 양, 면류관, 구원과 같은 키워드를, 'Sunday Girl'에서는 회개, 복음, Jesus Girl 등의 표현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성경의 키워드를 차용하여 해당 트랙들은 조휴일의 십대시절 대인 관계에 대한 관점을 묘사한다. 여기서 재밌는 점은 '어린양'에서의 "이제 너는 나를 더 많이 안아줘야 할 거야 조금씩 나를 더 알아가며 배워야 할 거야"라는 가사가 한편으로는 <201>의 '좋아해줘'의 "그래도 내가 싫어진다면 그건 아마 너의 잘못일 거야"라는 가사를 떠올리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사의 유사성은 자신에게 상처 주는 일은 모두 너의 탓이니 조심하라는, 어릴 때부터 꾸준했던(?) 조휴일의 여린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5번 트랙 'Friends In Bed'는 캐치하고 발랄한 기타를 앞세우며 앞선 트랙들에서 비춘 종교적인 삶 보다 그냥 친구들과 만나 40oz 술을 마시고 밤을 새우는 것을 더 좋아하는 조휴일의 모습을 비춘다. 특히 앞선 'Sunday Girl'에서 그는 브라키오사우르스, 스테고사우르스를 언급하며 성경의 창조론과 대비되는 관점을 드러냈었다. 그렇기에 'Friends In Bed'의 세속적인 일탈은, 어딘가에 묶이기 싫어하는 10대 시절의 자유로운 에너지를 그려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분주한 밤하늘 위로는
별이 아닌 것들만 떠다녀
잡을 수 없는걸 따라서
방황했던 어린 날의 기억
- Cicadas (매미들) 가사 中 -
6번 트랙 'Cicadas'는 묵직한 디스토션이 걸린 기타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강렬한 펑크 록 사운드를 통해 앨범의 하이라이트를 완성한다. 이 곡에서 조휴일이 자신을 투영하는 '매미'는 <Teen Troubles>에서 추억하는 '1999년 여름'의 상징이다. 알다시피 여름 한철의 시끄러움을 위해 매미는 부화하기까지 7년을 숨죽인다. 하지만 여름이 되면 매미는 그 무엇보다도 뜨겁게 타오른다. 이처럼 가장 아름다웠지만 영원하지는 않았던 그 10대 시절의 찬란함은, 여름이 지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름 한 달을 불태우는 매미와 상당히 비슷하다. 결과적으로 'Cicadas'는 이러한 비유와 강렬한 펑크 사운드의 결합을 통해, 잊을 수 없는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주제를 인상 깊게 전달한다.
'Cicadas'로 만들어낸 강렬하고 인상적인 하이라이트와는 달리 다음에 이어지는 'Garden State Dreamer'와 'Follow You', 'Jersey Girl', 'Love You The Same'은 앨범에서 뚜렷한 매력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나마 8번 트랙 'Follow You' 정도가 신나는 리듬감으로 처지는 방향성을 환기시켜주지만 전체적으로 아쉬운 느낌을 지워주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앨범은 여기서 더 이상 표류하지 않고 11번 트랙 'Powder Blue'를 통해 반전을 이루어낸다. 이 곡은 실속 없이 급하기만 한 사랑에 대한 염증을 컨트리를 활용하여 표현한 중독적인 트랙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어서 12번 트랙 'Electra'에서 앨범은 다시 한번 일렉기타를 중심으로 한 익숙한 팝 록 사운드로 돌아오며 옅어지던 노스탤지어를 다시 상기시킨다. 이렇게 'Electra'와 같이 <Teen Troubles>에서 조휴일은 자신의 옛 친구들의 이름을 딴 곡을 여기저기 배치시켜 놓았다. 이는 일부 허구가 섞여있긴 하지만, 앨범 전체적으로 자전적인 이야기가 담겨있는 만큼 전개의 사실성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물들의 등장은 리스너들이 주목할 수 있는 대상을 직접적으로 만들어 줌으로써, 앨범의 테마인 '그 시절 여름날의 그리움'을 전달하는 주요한 매개체가 된다.
다음으로 블루지한 색소폰의 사용이 눈에 띄는 'Min'을 통해 <Teen Troubles>에서 묘사되는 여름날의 방황은 정점으로 달려가기 시작한다. 먼저 앞선 'Love You The Same'이나 'Powder Blue' 등에서 드러났던 혼란스럽고 방향이 없던 관계는 이 시점에서 어느새 또 종말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 종말의 이유가 무엇이던 끝이 보이지 않는 질풍노도의 시기는 의지할 곳을 원하고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Min'에서 그려지는 것처럼 그가 선택한 정착지는 남자의 품이었다. 아직 'Min'에서는 그 관계가 정확히 사랑인지는 묘사되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16번 트랙인 'John Fry'의 가사를 통해 그 비행의 정점을 찍게 된다.
John Fry / 내 입술의 유일한 남자
비행을 위한 빠른 지름길
- John Fry 가사 中 -
'Jeff & Alana'는 조휴일이 <Team Baby>의 '한시 오분' 등에서 종종 사용해왔던 레게 스타일의 곡 전개에 급발진하는 메탈 사운드를 섞은 곡이다. 이 트랙 역시 'Electra'처럼 자신의 친구 이름과 스토리를 녹여내면서 옛 친구에 대한 걱정과 그리움을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Jeff & Alana'처럼 <Teen Troubles>의 모든 곡들은 단순히 <201> 시절의 펑크 사운드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앨범 전체를 아우르는 아련한 노스탤지어적 분위기는 <Team Baby> - <Thristy>의 몽롱한 드림팝 사운드로부터 가져왔고 <Don't You Worry Baby>의 통기타 컨트리 사운드 역시 앨범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Teen Troubles>에서 서로 다른 이 앨범들의 사운드를 하나로 이어주는 것은 <201> 스타일의 '그 시절 검정치마' 사운드이긴 하지만 말이다.
뒤에 이어지는 15번 트랙 'Ling Ling'은 'Antifreeze'와 같은 달콤한 러브송이자 매력적인 기타가 돋보이는 또 하나의 인상적인 팝 록 트랙이다. 다음곡 'John Fry'는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방황의 폭풍이 사실상의 극한으로까지 치달았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방황의 끝인 '99%'를 통해 조휴일은 지금까지 겪었던 미숙한 감정과 자극 없는 관계에 한탄하게 되고 결국 오랜 방황에 작별을 고하기 시작한다.
난 니가 대단한 예술가를 만나 나를 떠날 줄만 알았지
그럼 내게도 자극이 됐을 텐데 넌 항상 병신들만 만나
잠깐만, 그럼 난 뭐가 돼?!
- 99% 가사 中 -
그렇게 도착한 마지막 트랙 'Our Own Summer'에서 조휴일은 모든 것을 정리하고 그의 마음에 있던 최후의 사랑을 찾아간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최후의 사랑마저도 아무런 소득도 없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결국 록 스타가 되고 싶다는 거창한 꿈 말고는 모든 것이 부족했던 1999년 어느 여름날의 방황과 사랑은 순수했던 발악만을 남긴 채 허무하게 끝나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곡은 수미상관으로 첫 번째 트랙 'Flying Bobs'와 동일한 매미 소리로 채워지며 씁쓸한 노스탤지어를 리스너에게 전달한다.
이렇듯 <Teen Troubles>는 조휴일의 모든 음악적 역량이 하나로 집대성된 앨범이자 치열했던 여름날을 향한 그리움을 담아낸 앨범이다. 다만 반가운 그 시절 사운드와 테마가 주는 즐거움 외에는, 다소 긴 러닝타임과 구성상의 늘어짐 등이 겹쳐있어 전체적으로 아쉬움이 남기는 한다. 아마 비슷한 앨범을 하나 비유하자면 Oasis의 3집 <Be Here Now> 정도의 포지션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Teen Troubles>가 전하는 그리움의 메시지가 유독 특별하고 혹자는 커리어 최고의 앨범이라고 반기는 이유는, 오랜만에 돌아온 검정치마의 바로 그 펑크 사운드 때문일 것이다. 물론 그 사운드가 들어간 앨범도 <201> 하나뿐이고 그마저도 이제는 20주년이 더 가까워졌지만, 누군가에게는 'Cicadas'의 가사처럼 밝고 짧게 타올랐던 2008년의 그때가 가장 아름다운 그리움일지도 모른다.
밝고 짧게 타오를 때
가장 아름다운 거야
아직까지 기억에 선명한 <201>의 그 사운드야 말로, 그 시절 검정치마가 새겨놓고 간 뜨거운 사랑의 그림자일 테니 말이다.
검정치마 - <Teen Troubles>
<Track List>
1. Flying Bobs ★
2. Baptized In Fire (불세례) ★
3. 어린양 (My Little Lambs)
4. Sunday Girl
5. Friends In Bed ★
6. Cicadas (매미들) ★
7. Garden State Dreamers
8. Follow You (따라갈래)
9. Jersey Girl
10. Love You The Same
11. Powder Blue ★
12. Electra ★
13. Min (미는 남자)
14. Jeff & Alana
15. Ling Ling ★
16. John Fry
17. 99%
18. Our Own Summ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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