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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투른 갈망으로 바라본 네버랜드의 출구

: 파란노을 -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

- Released : 2021.02.23.
- Genres : Shoegaze, Emo, Post-Hardcore


 회피는 두려움의 방어기제이다. 불안정한 결과와 추정된 실패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이기에, 우리의 본능은 미숙함을 핑계로 회피로써 응답한다. 하지만 이것이 한두번의 패배라면 충분히 도망갈 곳이 있겠지만, 거듭된 실패 앞에서는 전혀 소용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모든 회피와 불안의 종착지는 오직 자신만이 닿을 수 있는 완전무결의 네버랜드에 위치한다. 그 네버랜드가 조그만 방구석이든, 추억의 저편이든, 무엇이든 간에, 적어도 그곳에서 만큼은 아무 걱정 없이 무사할 테니 말이다.

 

모두가 바뀌어 갈 때 영원할 나의 영토여
세상이 나를 등지더라도 나만은 나를 지켜주기를

- 격변의 시대 가사 中 -

 

 이모(Emo)는 80년대 중후반 하드코어 조류에서 파생되어 그 이름처럼 감정(emotion)의 직접적인 표출을 중심으로 구체화된 장르이다. 그렇기에 이모는 행복감보다는 우리가 본능적으로 숨기고자하는 불안, 절망, 우울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에 기반을 두고 있다. 물론 그 '감정의 표출'이라는 것에는 명확한 음악적 방법론이 없었기에, 이모는 비교적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확장될 수 있었다. 예시로 Jimmy Eat World는 팝 펑크적인 요소를 차용하여 이모를 대중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렸고, 다른 한편으로는 표출에 초점을 맞추어 스크리모(Screamo)와 같은 형태가 등장하기도 했다. 특히 90년대 중후반 미국 중서부의 일리노이, 인디애나 주 등지에서 태동한 미드웨스트 이모(Midwest Emo)는, 매스 록(Math Rock)의 구조와 기타 아르페지오를 도입하며 독창적인 스타일을 정립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에 비해 국내의 이모씬은 할로우 잰 정도를 제외하면 평론과 대중 모두에게서 상대적으로 외면받는 편이다. 이는 이모가 드러내는 '부정적인 감정의 표출'이 아무래도 직관적으로 거부감이 들기도 하고, 우리나라의 보편적인 정서 역시 이와는 대척점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배경 하에서 지금껏 파란노을은 그 거부감을 완화하기는커녕 감정을 극대화하는 쪽을 선택했다. 특히나 슈게이즈와 포스트록을 기반으로 한 그의 음악은 그렇지 않아도 낮은 접근성을 한계치까지 떨어트린 주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물론 국내에서 해당 씬에 대한 주목도가 전무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 (이하 <TSNPD>) 이전까지, 끝이별-파란노을로 이어진 일련의 연속성은 기존의 속옷밴드, 로로스 등에 비해 특별한 신선함을 보여주지 못했다. 더군다나 파란노을이 조월과 같이 나름의 이름값(?)을 가지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기에, 그의 음악들을 향한 철저한 무관심과 실패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결과였다. 그렇기에 파란노을이 <TSNPD>에서 내면의 네버랜드를 마주하고 이를 앨범으로 담아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파란노을 - '아름다운 세상'
나의 비참한 모습을 아무도 보지 않았으면
나의 수많은 실패를 누구도 보지 않았으면
나의 어리고 멍청했던 날들은 사라져줬으면

- 아름다운 세상 가사 中-

 

 앞서 언급한 것처럼, 파란노을의 두 번째 앨범 <TSNPD>는 내적 불안의 최종 방어기제이자 자신만이 닿을 수 있는 불가침의 도피처에 초석을 두고 있다. 그렇기에 <TSNPD>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과 향수에 기반을 둔다. 대표적으로 《릴리 슈슈의 모든 것》, 《NHK에 어서오세요》, 《신세기 에반게리온》 등에서 차용된 샘플링들이 그 예시라고 할 수 있다. 해당 작품들은 -적어도 국내의 인식 상에서는- 지극히 컬트적이고 대중적으로 널리 소모되지 못했을 뿐 더러, 각각의 공통적인 연결고리 역시 사실상 당사자가 아니고서는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대부분 일본 영화/애니메이션을 레퍼런스로하기 때문에 <TSNPD>의 색깔은 더욱 이단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앨범은 이러한 거리감 조성을 통해 리스너들의 섣부른 공감대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이모라는 장르에 맞게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중심으로 앨범을 풀어나가게 된다.

 

 먼저 1번 트랙 '아름다운 세상'의 도입부와 앨범 아트를 보란 듯이 차지하고 있는 것처럼,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 대한 샘플링은 <TSNPD>의 여러 음악적 장치들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이는 이와이 슌지(岩井 俊二)의 작품들 중에서도 가장 암울하고 비참한 스토리를 가진 영화답게 앨범의 감정선을 요약적으로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작품에서 주인공이 겪는 사회적 고립과 '에테르'로 표현되는 안식의 이상향, '릴리 슈슈'를 통한 멸망적인 구원은, <TSNPD>의 시작 동기인 거듭된 실패, 그에 따른 불안의 회피와 온전히 맞닿아있다. 그렇기에 20년이 다 되어가는 이 영화에 대한 추억은, 파란노을 본인의 절망적인 현실과 자연스레 연결되며 지극히 개인적인 안식처를 앨범 속에 구현하게 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1인 밴드의 묘미를 살린 지저분한 가상드럼과 소음의 벽은 구체화된 그 네버랜드를 철저히 둘러싸며 고립감을 더욱 침전시켜 나간다.

 

 이어지는 트랙 '변명'은 그곳으로의 도피 이유에 대한 자조적인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곡에서 파란노을은 열등감에 찌든 정체된 자아와 좌절 끝에 거세된 투지를 그 원인으로 지목한다. 특히 절정부에서 《릴리 슈슈의 모든 것》의 절규를 타고 피해망상적으로 읊조려지는 열등감은 곡의 백미로, 내재된 패배주의를 발산하는 장치로써 작용한다. 그리고 그렇게 발산된 비관의 끝에는 3번 트랙 '아날로그 센티멘탈리즘'이 위치한다. 이때 곡은 앞선 트랙들과 달리 노스텔지어한 신디사이저 사운드를 기반으로 어린 날의 추억을 조명한다. 이러한 추억의 회상은 네버랜드가 주는 안식이자 좌절감의 해소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나 곡은 "분식집의 콜팝과 슬러시", "뽑기", "문방구의 오락기기", "노는 토요일"과 같은 표현들을 통해 철저하게 '대한민국 90년대생'에 타겟팅된 향수를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이에 반응할 수 있는 유일한 세대이자, 파란노을과 동일한 절망적 청춘들에게 '아날로그 센티멘탈리즘'의 네버랜드가 제공하는 안녕은 보다 더 직접적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파란노을 - '아날로그 센티멘탈리즘'

 

 하지만 '아날로그 센티멘탈리즘'을 통한 자기모멸감의 해소는 "만약 이 모든게 꿈이었다면, 다시는 깨고 싶지 않을 거야"라는 처량한 엔딩이 무색하게 금방 종말을 맞이한다. 그리고 곧바로 꿈을 깨우는 차가운 알람 소리와 함께 4번 트랙 '흰천장'이 시작되면서, <TSNPD>는 다시금 현실로 시선을 돌린다. 여기서 곡은 서사적인 구성을 기반으로 앞선 트랙에서 표현된 완전무결한 네버랜드와 불완전한 현실을 대비시키며 그에 따른 열등감을 극대화한다. 이렇게 '아날로그 센티멘탈리즘'-'흰천장'으로 전개되는 클라이맥스를 통해, 앨범은 상호배반적인 감정을 교차시키면서 청소년기를 벗어나 성인이라는 이름으로써 마주하는 무게감과 아직 성숙하지 못한 정신 간의 격차를 드러낸다. 특히 격렬한 알람 소리와 함께 곡의 후반부를 가득 채우는 《릴리 슈슈의 모든 것》과 《NHK에 어서오세요》의 샘플링은, 아직도 그 네버랜드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자기모멸감을 표출하는 장치로써 작용한다. 나아가 지글거리는 노이즈 사이를 채우는 흐릿한 신디사이저가 돋보이는 5번 트랙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은 앞선 '흰천장'과 다시 한번 대비되며 비참함을 극대화 한다.

 

 <TSNPD>를 특징짓는 네버랜드의 폐쇄성은 '격변의 시대'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현실이 아무리 냉정하다고 하더라도 누군가는 패배감을 극복하고 자연스러운 정신적 성장을 이루어낸다. 하지만 앨범에서 그려지는 파란노을 본인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그 격변의 시대 속에서 성숙을 이루어낸 "반기를 든 동료"들과 달리, 아직도 그 패배감의 도피처에 갇힌 채 전혀 변화하지 못한 미숙한 자아는 더욱더 열등감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다. 결국 현실과 고립된 이상 속의 네버랜드는 불안의 회피처로 위장한 미성숙의 굴레와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극적 본질과는 달리 곡은 후반부에서 "세상이 나를 등지더라도 나만은 나를 지켜주기를"이라는 가사를 반복하며 그 폐쇄성을 더욱 강화해 나간다. 이와 함께 곡은 치밀하게 쌓인 노이즈 위에 몽환적이고 달콤한 기타 아르페지오를 맞물린 다음, 처절한 절규로 확장하며 그 절망의 카타르시스를 장렬하게 폭발시킨다.

 

파란노을 - '흰천장'
못할걸 잘 알면서도
안될걸 잘 알면서도
그래도 발버둥 치고싶어

-청춘반란 가사 中-

 

 7번 트랙 '청춘반란'은 앞서 표현된 폐쇄적인 안식에 대한 저항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곡에서 파란노을은 빠른 템포와 환기적인 멜로디를 중심으로 나름의 극복 의지를 드러낸다. 특히 리스너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인기(?)를 끈 "찐따무직모쏠백수아싸병신새끼"라는 상징적인 자각은, 소심하지만 그 질식적인 네버랜드의 탈출구로 시야를 분명히 전환했음을 시사한다. 나아가 "락스타"로 대표되는 분명한 동경의 대상은 그 의지를 자극하며 네버랜드의 유일한 출구가 "꿈의 다음 장 (Next Part of Dream)"과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낸다. 물론 이어지는 '엑스트라 일대기'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그러한 극복 의지를 품는다고 해서 즉각적인 효과가 나타나지는 않는다. 결국 나약한 의지를 받쳐주지 못한 무기력한 현실 앞에서, 파란노을은 자신이 세상의 주인공이 아닌 엑스트라일 뿐이자, 변할 수 없는 겁 많은 'Chicken'일 뿐이라는 비관을 또다시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그 결과로 이어지는 앨범의 피날레, 'I Can Feel My Heart Touching You'은 역설적이게도 더 큰 패배감이 아닌 자유와 해방감으로 리스너를 이끈다. 여기서 곡은 아련한 기타를 바탕으로 수동적인 성숙을 풀어내는데, 이는 불안의 도피처로 위장한 그 질식적인 네버랜드에서의 탈출을 통해 이루어진다. 마치 단테의 《신곡》에서 지옥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내려갔을 때 그 정반대 끝에 위치한 것으로 묘사되는 연옥과도 같이, <TSNPD>의 출구 역시 소심한 '청춘반란'을 실패하고 다시 마주한 절망의 가장 깊은 곳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그때서야 비로소 "꿈"이라는 서투른 갈망이 길잡이가 되어 네버랜드의 탈출구로 화자를 이끈다. 결과적으로 곡의 이러한 수동적인 극복 과정은 "하늘", "새", "비행"과 같이 희망적이면서도 그곳에서의 정신적 자살을 암시하는 중의적인 메타포와 연결되며 씁쓸한 해방과 정신적 성숙을 표현하게 된다.

 

파란노을 - '청춘반란'

 

 이렇듯 파란노을은 자기혐오로 점철된 가사들과 평균 이하의 보컬, 심지어 거부감 넘치는 장르 선정까지, 사실상 성공할 수 없는 모든 조합들로 <TSNPD>를 엮어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당연히 외면 받을 것 같았던 이 패배주의적 고백은, 뜻밖에도 모든 화제성을 잡아먹으며 순식간에 2021년 최고의 문제작으로 떠올랐다. Rate Your Music 메인 페이지에 걸린 하나의 리뷰를 시작으로 종국에는 그 유명한 Pitchfork 리뷰로까지 이어진 일련의 연쇄작용이 폭발한 것이다. 물론 <TSNPD>가 편집증적 피해망상과 지질한 패배주의, 어설픈 아마추어리즘으로 가득 찬 앨범인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유명세를 얻는 과정에서 발생한 과도한 하이프(hype)에 대한 반감과 음악적 호불호도 자연스럽게 따라왔지만, 단지 이를 이유로 앨범의 성공을 일차원적으로 폄하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앨범에 담겨진 패배감과 그 방어기제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을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많은 리스너들에게 공감을 받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 시작이 국내가 아닌 해외였다는 점에서 이러한 보편성은 그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가사적인 측면을 제외하고, 순수한 음악적 표현만으로도 <TSNPD>의 네버랜드가 세계의 리스너들에게 온전히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2021년의 음악을 다시 돌아봄에 있어서 <TSNPD>를 단순한 반감만으로 완전히 배제하기에는 큰 공백이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록 그 네버랜드가 여전히 너무나도 적나라하고 서투르게 느껴질지라도,

 

세상은 아름다워 나 같은 놈도 먹고 사니까

 

어느 누군가에게는 마법과도 같은 출구이자 파란(波瀾)의 시작이었을 테니 말이다.

 

파란노을 -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


+ 여담이지만 파란노을은 <TSNPD> 이후 2집의 성공을 마법에 비유하며, <After the Magic>이라는 앨범명으로 3집을 발매한다.


<Track List>
1. 아름다운 세상 ★

2. 변명 ★

3. 아날로그 센티멘탈리즘 ★

4. 흰천장 ★

5.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

6. 격변의 시대 ★

7. 청춘반란 ★

8. 엑스트라 일대기

9. Chicken

10. I Can Feel My Heart Touching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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